퇴직연금 적립금이 100조원을 돌파했다. 고령화로 퇴직연금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게 첫 번째 이유다. 여기에 정부가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으로 시행한 추가 납입과 세금 감면 혜택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급격히 불어난 퇴직연금 덩치에 비하면 막상 가입자의 관심은 뜨겁지 않다. 자신의 퇴직연금 유형이 DB형인지 DC형인지조차 모르는 가입자가 태반이다.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를 이용하는 방법이나, 퇴직연금에 부과된 혜택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전문가들은 내 몸에 맞는 퇴직연금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보다 적극적인 운용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노후대비+세제혜택…연금시장 ‘붐업’
의무가입 사업장 늘고 고령화 경각심 커지며 적립금 100조원 돌파
수익률 낮은 DB형 편중 심각…다소 위험 있더라도 DC형 늘려야
퇴직연금 적립금 100조원 시대가 열렸다. 지난해 말 기준 107조658억원으로 100조원을 돌파했다. 2013년 84조3000억원에 비해 23조원 가까이 늘어나며 최근 3년간 최대 증가 폭을 기록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앞으로도 빠른 속도로 쌓일 가능성이 높다. 국회 계류 중인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이 올 상반기 중 통과되면 내년부터 300인 이상 사업체의 퇴직연금 가입이 의무화된다. 또 단계적으로 의무가입 대상이 확대돼 2022년부터 모든 사업장이 퇴직연금에 가입해야 한다.
이 밖에 빠른 고령화 현상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 퇴직연금 시장의 성장세를 예고한다.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교육포럼 대표는 “조기 은퇴와 적지 않은 노후 생활비에 대한 불안감이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 노후 안정을 높이려는 정부의 각종 정책도 영향을 끼칠 듯 보인다. 정부는 퇴직연금(DC형 , IRP 계좌)에 본인이 추가로 자금을 납부할 경우, 개인연금저축 납부액과 합산해 연간 총 700만원까지 13.2%의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했다. 2013년까지는 40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가능했지만 2014년 소득분부터 금액을 늘렸다. 또 퇴직연금 적립금에 대해 별도로 5000만원까지 예금 보호 한도를 적용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예금 등 다른 금융상품과 합해 예금자 1인당 5000만원까지만 보호해왔다.
그러나 퇴직연금이 덩치에 맞춰 질적으로 성장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국민 노후 안전판 마련하려는 정부
DC형에 세제혜택·예금보호 늘려
가입자도 적극적인 운용전략 짜야 무엇보다 수익률을 높여야 한다. 지금까지 금융사들은 원금 손실이 적은 안정형으로 주로 운용해왔다. 정기예금이나 금리가 확정된 보험과 같은 원리금 보장 상품 적립금이 98조7000억원으로 전체의 92%가 넘는다. 이는 선진국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OECD 31개국 퇴직연금 평균 예금 비중은 3.7%고, 미국은 이 비중이 1%에 불과하다. 국내 금융사들은 그저 원금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만 관리해온 셈이다.
주식 투자 비중도 지나치게 낮다. OECD 31개국 평균 주식 비중은 40%에 달했고 미국과 호주는 그 비중이 50%에 육박한다. 한국은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하는 비중이 6% 미만이고 주식은 0.1%에 불과하다. 극도의 위험회피 전략으로 퇴직연금이 돈 안 되는 노후 안전판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이 소득 30%를 메울 수 있어야 적정한데 현재는 연금이라 부르기 힘든 수준의 수익률”이라고 꼬집었다.
이와 맞물려 가입자의 투자 성향도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의견이 많다. 지난해 말 기준 전체 적립금의 70.5%는 DB형이었다. DB형은 사용자가 책임지고 운용하며 근로자는 퇴직할 때 정해진 액수를 받는다. DC형은 근로자가 직접투자하고 수익률을 관리해야 한다. 많은 가입자들이 회사가 퇴직연금을 책임져주길 바랄 뿐 스스로 능동적으로 수익을 내려 하지는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최문희 FLP컨설팅 대표는 “퇴직연금을 안전하게 운용해야겠지만 장기 투자를 전제로 하니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내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김성일 KG제로인 퇴직연금연구소장은 “많은 나라들이 기업이 퇴직연금 가입자 교육을 제대로 시키도록 법으로 규정해놨는데 한국도 이런 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과 같은 초저금리 시대에서 DB형만으로 노후를 준비하기는 힘들다.
앞으로 10년 뒤 DC형 퇴직연금이 167조원 규모로 성장해 전체 퇴직연금 시장의 4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가입자들도 DC형을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수익을 내야 한다.” 강창희 대표의 조언이다.
[특별취재팀 : 명순영(팀장)·배준희·류지민 기자 / 그래픽 : 신기철]